언어와 활자 사이를 유영하는 일한 번역가, 출판 편집자. 언어도 디자인이라고 여기며 일본어를 우리말로 옮기고 책을 기획해 만든다. 『도쿄 호텔 도감』 『1970년대 하라주쿠 원풍경』 『디자이너 마음으로 걷다』 『몸과 이야기하다, 언어와 춤추다』 『노상관찰학 입문』 『초예술 토머슨』 『저공비행』 『느긋하고 자유롭게 킨츠기 홈 클래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블루진이 한 세기를 지나며어떻게 작업복 오버롤스에서 오늘날의 501XX 진으로 변모했고, 창업자 리바이 스트라우스와 재단사 제이컵 데이비스를 거치며 리바이스라는 회사가 어떠한 길을 걸었는지 지켜볼 수 있었다. 그 여정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리고 그 글들 사이에서 한 가지 놓친 것이 있음을 「옮긴이의 말」을 쓰기 위해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면서 비로소 알았다. 이 책에는 수많은 ‘노동’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진이 노동자의 작업복이라는 위치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너무나 당연한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리벳이 달린 진은 한 여성의 의뢰에서 비롯되었다. 노동자인 남편의 바지가 낡아 튼튼한 작업 바지를 만들어달라면서 재단사인 제이컵을 찾아온 여성. 이에 제이컵은 두꺼운 덕원단에 구리 리벳을 달아 아주 튼튼한 바지를 만들어주었고, 이것은 마부와 측량사들 사이로 퍼져나간다. 후에 제이컵과 리바이, 둘이 손을 잡으면서 지금 우리가 입는 청바지의 기본형이 탄생했다. 이후 리바이스는 공장을 마련하고 대량생산을 꾀하며 성장해간다. 그때부터 신문에 등장한 것이 바로 재봉틀 직공을 구하는 구인광고다. 처음에는 열 명, 쉰 명 등 소수의 숙련자를 모집하던 공고는 생산량이 증가하고 공장 수가 늘어날수록 생산과정을 세분화해 “걸스!”를 연호하며 젊은 직공을 모으기 시작한다. 『501XX는 누가 만들었는가』는 100년 세월을 관통하는 구인광고가 책 전반에 걸쳐 꾸준히 등장하는 책이기도 하다.
110~111쪽의 이미지는 그러한 노동의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게 한다. 501이라는 제품번호가 등장하는 1897년 무렵 리바이스 공장의 광경. 루페로 보아야 겨우 가늠되는 두 남자(리바이와 제이컵으로 추정)와 힘껏 재봉틀을 밟으며 오버롤스를 만드는 여성 500명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전통적으로 옷 짓는 일이 여성의 일이었듯이, 오버롤스의 생산을 도맡은 이들도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 노동의 배경에는 노동자와 이민자를 도시로 불러들인 골드러시(1848)라는 역사적 사건과 함께 1867년의 대륙횡단 열차 개통에 바탕한 유통 변화, 1890년대 전기보급이 불러온 산업 변화도 있다. 이 밖에도 책 곳곳에 다양한 노동의 이야기가 놓여 있다. 리바이스에서 아이들의 오버롤스를 제작한 것은 당시 아이들이 중요한 노동자원이기 때문이었고, 2차 세계대전 중 정부의 물자규제로 아큐에이트 스티치의 오렌지색 실 대신 칠한 빨간 페인트는 여성 한 사람이 맡았으며, 값싼 아시아 노동자와 자리 잃은 백인 노동자가 갈등하던 대불황 시기의 리바이스 전단에는 ‘홈 인더스트리’란 문구가 찍혀 있다. 그러한 흔적들을 발견하며 내가 지금 입고 먹고 사용하는 모든 것들 뒤에 보이지 않는 얼굴들이 존재함을 되새긴다. 멀게는 수백 년, 가깝게는 몇 년, 몇 달, 심지어 바로 어제를 살던 이들의 땀 어린 얼굴들 말이다. 그렇게 이 책은 내게 지은이가 말한 공업제품사에 더해 노동사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