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없는 길 (『나는 너다』 1987년 1월 풀빛 초판)
서울 美文化院 점거농성 사건으로 세상이 시끌벅적했던 작년 늦봄, 김지하를 만났을 때 그는 나에게 ‘華嚴’과 ‘다스 카피탈’을 포괄하는 大世界觀을 말했다. 이 테제, 혹은 공안이 나에게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禪師들은 劍客을 닮았다. 내 골통을 半으로 가르는 가장 빠른 생각은 메모다. 메모랜덤 : 기억을 위한 符籍!
세번째 詩集을 묶는다.
두번째 시집을 묶을 때 함께 넣을까 말까 망설였던, 메모 같은 시들이다. 그 가운데 일부를 올여름까지 드문드문 발표했었고, 몇 편은 새로 쓰기도 했다. 이미 써놓았던 것들을 나중에 볼 때 치밀어오는 부끄러움이 加筆을 하게 한 곳도 몇 군데 있다. 제목을 대신하는 數字는 서로 변별되면서 이어지는 내 마음의 불규칙적인, 자연스러운 흐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말하고 기록하는 모든 형식들에 관심이 몰려 있던 그 당시 나로서는 電文을 치듯, 火急하게 아무거나 詩로 퍼 담으려는 탐욕에 급급했던 것 같다. 지금 보니, 냉랭하다. 活活 타오르는 시를 언제쯤 쓸 수 있을까?
詩들을 정리할 때마다 두렵다. 마음이 체한다. 이제 어디로 빠져나갈까? 없는 길을 찾아 나가기가 이렇게 버거울까?
1986년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