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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예술

이름:임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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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엑스포츠 온 페이퍼>

임경용

2007년 소규모 출판사 미디어버스와 2010년 더 북 소사이어티를 구정연과 함께 공동으로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출판과 관련된 전시나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제록스 프로젝트≫(백남준아트센터, 2015), ≪예술가의 문서들: 예술, 타이포그래피 그리고 협업≫(공동기획, 국립현대미술관, 2016),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 ≪좋은 삶≫( 디렉토리얼 컬렉티브, 서울시립미술관, 2018) 등이 있다. 알레한드로 루도비코의 『포스트디지털 프린트: 1894년 이후 출판의 변화』(미디어버스, 2017)를 한국어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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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엑스포츠 온 페이퍼> - 2023년 9월  더보기

2023년 1월, 장원쉬안이 이 책을 들고 더 북 소사이어티를 방문했을 때 어느 누구도 이 책이 한국어로 출간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머물렀던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이 책이 한국 독자에게 읽힐 수 있으면 근사하겠다고 생각해서 그 자리에서 번역 출간을 제안했다. 이 책은 2022년 11월에 발간된 『Xsport on Paper: Samplings of Publishing Practices from the Global South』의 한국어 완역본이다. 서문에서 저자가 이 책을 쓴 동기를 밝혔지만, 한국어판 출간에 대해 짧게 이야기해보려 한다. 책의 부제가 시사하듯, 이 책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18가지의 ‘출판 실천’을 다루고 있다. 기행문 형식을 취한 이 책에서 ‘글로벌 사우스’라는 지리적 범주는 꽤 중요하다. 2017년 카셀 도큐멘타에서 ‘남쪽’이라는 범주를 제안한 이후, 이 지역은 현대미술 담론에서 상당히 중요한 무대가 되고 있다. 물론 어느 누구도 ‘남쪽’이나 ‘글로벌 사우스’에 대한 명확한 지리적 경계를 규정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호한 지리적 경계는 개별 실천 안에서 정의되기 마련인데, 최소한 이 책에서 ‘글로벌 사우스’는 ‘식민 지배에 대한 경험이나 기억,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위치’라는 느슨한 공통점을 보여준다. 반면, 여기서 소개한 사례들은 각자의 역사나 맥락에 따라 뚜렷하게 구별되는 차이도함께 가진다. 이러한 차이는 이 책에서 또 다른 중요한 범주가 되는 ‘출판 실천’ 역시 ‘탈식민화’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준다. 사실 이 책을 읽다 보면 많은 독자들이 정말 이 책이 ‘출판 실천’에 관한 것인지 의아해할 것 같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자율적이고 자기 조직적 출판 실천은 이 책에서 전혀 다른 감각과 의미를 획득한다. 유럽이나 미국의 급진적인 기관이나 비엔날레, 아트북페어, 출판 관련 프로젝트 등을 통해 조금씩 누적되면서 (개념미술에서 시작되었을) 만들어진 자율적 주체로서 ‘출판 실천’은, ‘글로벌 사우스’라는 장소에서는, 과거를 현재화하고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기 위한 효과적인 도구가 된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책을 하나의 상품이나 매체가 아니라 해당 사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역사적 내러티브와 논쟁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책은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라 (물론 그러한 역할도 하지만) 논쟁과 불화를 일으키는 장소에 가깝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 서문에서 저자는 이 책이 사미즈다트(자주 출판), 선언문 그리고 아카이브라는 3개의 키워드로 구성되어 있다고 밝힌다. 이 키워드는 사실 20세기부터 서구가 발전시켜온 가치와 연결된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나 공동체가 행하는 자주 출판은 출판 기술의 발전과 함께 상품으로서의 책과 대척되는 지점을 만들고 있다. 이것은 20세기 이상주의자들이 꿈꿨던 유토피아에 대한 생각이 응축된 선언문이라는 형식을 통해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를 보존하고, 확산하며, 교육하기 위한 장소로서 아카이브를 상상할 수 있다. 반면 서구가 만들어낸 이러한 가치는 식민지와 글로벌 자본주의를 거치면서 왜곡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가치가 새로운 형식이나 내용으로 발아할 수 있는 장소로 ‘글로벌 사우스’를 상상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서의 출판 주체는 이 책에서 좀 더 구체적인 맥락과 전략 안에서 (혹은 특정한 장소 안에서) 분화하거나 변형된다. 이들은 출판 실천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용법을 고안함으로써, ‘출판 실천’을 탈식민화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래서 장원쉬안의 이 여정은 우리 앞에 매우 낯선 풍경을 보여준다. 투어리즘에 의해 채색된 동남아시아나 남아메리카의 풍경이 아니라, 이 책의 제목처럼 치열한 투쟁이 일어나는 경기장 같은 풍경이다. 동시에 그의 여정에서 책이 개입하는 방식도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책은 특권화된 매체라기 보다 그냥 옆에 무심히 놓여 있는 무언가에 가깝다. 역설적으로 나는 이 순간 책의 대단함이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지금을 위해 과거를 소환하고 미래 세대를 위해 과거를 다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책을 선택한다. 어쩌면 최근 출판이 점점 더 사용 가능한 매체가 되는 것은, 출판 산업이 제작이나 유통에 있어서 다른 미디어 산업만큼 기민하게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다. 출판은 앞으로 점점 더 다양해지고, 소수화될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상황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증명한다. 가끔 어떤 책은 빠르게 출간되는 것이 중요하다. 책을 번역해서 출간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나는 이 책이 무엇보다 빨리 출간되길 원했다. 그래서 책을 내기로 결정한 후 최대한 서둘러 번역을 시작했다. 이 책이 왜 과거형이 아니라 진행형으로 써졌는지, 그녀의 경험과 지금 우리의 읽기 사이에 시차가 없어야 하는지, 나는 그 이유를 번역을 마친 뒤에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책에 나온 사례들이 보편적이지 않을 수 있다. 특히 한국의 출판 문화를 떠올려보면, 그 어떤 사례도 한국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사회든 책을 만들고 유통하는 조건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이 책을 주의깊게 읽을 수 있다면, 누구나 여기에 등장하는 활동가들이 각자 혼신의 힘을 다해 행동하고 사회를 바꾸려고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이것은 ‘남쪽’이냐 ‘북쪽’이냐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한국 안에도, 심지어 유럽이나 미국 같은 1세계 안에도 무수한 ‘남쪽’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책의 사례들이 매우 지역적이고 구체적인 맥락을 가지고 있지만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래서 좀 더 다양한 독자들이 이 책을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은 우리가 여전히 종이 책을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멋진 경험을 선사해준 장원쉬안에게 감사드린다. 이 경험이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독자들에게도 증식되고 확산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또한 항상 부족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책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에 적합한 형식을 찾아주는 디자이너 신신에게도 감사한다. 책에서 다뤄지진 않았지만 그녀가 바치고자 했던 익명의 활동가들의 노력에 이 책이 닿을 수 있으면 한다. 그것이 폐허가 된 지금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책이 수행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이라 믿는다.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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