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이후 장이모와 함께 중국 영화계를 대표해온 세계적 영화감독. 1993년 전세계 관객들에게 사랑 받은 <패왕별희>로 칸 국제영화제에서 영예의 황금종려상과 세계 유수의 영화제를 휩쓸면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거장의 자리에 올랐다. 선보이는 작품마다 세계 속의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소외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등 인생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로 주목을 받았다.
아버지 첸 화이 아이는 북경전영제편창(북경영화제작소)의 저명한 감독이었으나, 문화혁명의 와중에 하방 대상이 되어 첸 카이게가 16세일 때 남쪽 운남성의 시골로 이주해 농민들과 함께 생활했다. 1971년 군대에 입대하여 홍위병으로 복무하는데 이 시절의 그의 경험은 〈황토지〉나 〈아이들의 왕〉에서 영화로 옮겨 졌다. 1975년 북경으로 돌아온 그는 한 현상소의 조수로 근무했고 1978년 등소평의 등장과 함께 북경으로 다시 올라온 첸 카이게는 북경전영학원(북경 영화 아카데미) 감독과에 입학, TV 드라마 제작에 참여했다. 이 때 함께 수학한 장예모, 〈푸른 연〉의 티엔 주앙주앙, 유진위 등은 오늘날 8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의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은 이른바 '제5세대'의 선두주자들로 기록되어 중국 영화의 부흥에 절대적 공을 세운다. ‘5세대 감독’은 영화의 색채, 조형적 요소, 사운드 및 중국 문화의 사색적인 면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982년 학교를 졸업한 뒤 북경전영제편창에서 일했는데, 1984년 첫 작품인 〈황토지〉를 발표해 영화계에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북경전영학원 동창인 장예모가 촬영을 맡은 〈황토지〉는 황하 상류 지역의 황량한 대지를 배경으로 민중의 삶을 역동적으로 잡아낸 작품이었는데, 문화혁명 이후 처음으로 해외영화제에 선보여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은상을 수상, 중국 '제5세대'의 등장을 선언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황토지〉는 공산당 지도부에 의해 중국의 빈곤과 후진성을 외부 세계에 폭로한 반동적인 영화로 낙인 찍히면서 중국 내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켜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는 지경에까지 몰고 갔는데, 옴태 해외영화제에서의 호평으로 작품 활동을 중지당하는 최악의 경우는 피할 수 있었다.
1985년에 만든 〈대열병〉은 그런 까닭에 편집권을 빼앗겨 만족스러운 작품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1987년 몬트리올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1987년에 만든 〈해지왕/아이들의 왕〉은 문화혁명 기간에 변경의 오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선생이 당국의 지침과는 다르게 가르치다 농부로 쫓겨나는 과정을 그린 영화였는데, 1988년 칸에 정식 출품장으로 선정되어 좋은 평을 받으면서, 〈황토지〉의 명성을 다시 세계인에게 확인시켜 주는 작품이 되었다.
이후 1987년 첸 카이게는 뉴욕대학 영화과 객원교수 자격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대학에서 3년 동안 영화 강의를 했는데, 천안문 사태가 벌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말류에도 불구, 자기 땅에서 영화를 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1990년에 귀국, 영국과 독일의 제작비 후원으로 만들어진 〈현위의 인생〉으로 그 해 칸 영화제등 각종 영화제의 상을 휩쓸며 그의 영화 작가로서의 명성을 더욱 굳건히 했다.
1993년에는 홍콩과 합작으로 동성애적인 관계에 빠진 두 경극배우를 통하여 중국 현대사를 그린 〈패왕별희〉를 만들어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와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해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거장의 대열에 올라섰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 [어느 영화감독의 청춘]도 집필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