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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모윤숙

성별:여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09년, 함경남도 원산

사망:1990년

직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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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모윤숙 시선>

모윤숙

1909년 음력 3월 5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아버지 모학수와 어머니 임마태 사이에서 2남 3녀 중 2녀로 출생했다. 1917년 모윤숙은 원산 진성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보통학교 3학년 때 숙부의 도움을 받기 위해 가족 모두 함흥으로 이사함에 따라 1925년 함흥 영생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5년 숙부의 도움으로 개성에 있는 호수돈 여고 2학년 가을 학기에 편입해 1927년에 졸업한다. 학비와 기숙사비는 숙부가 부담했지만 용돈은 모윤숙 스스로 마련했다. 호수돈 여고 3학년 때 전국 YWCA 학생 하령회 대표로 서울에 와서 김활란 박사의 강의 <청년과 신앙>을 듣고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조국의 현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한편 고등학교 재학 시절 일본어로 된 세계 문학 전집과 ≪개벽≫을 통해 김억, 주요한, 김소월 등의 시를 접하게 되고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1927년 이화여전 예과 영문과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3학년 때에는 전교 학생회장, 기숙사 학생회장을 하면서 문학의 정열을 키워 갔다. 1929년에는 교지 ≪이화(梨花)≫를 창간해 편집부장을 맡아서 시와 소설, 논설 등의 많은 글을 ‘M’, ‘MYS’, ‘해송(海松)’, ‘윤숙’ 등의 필명으로 발표했다. 문학 외에도 연극에 관심이 많아 연극 <잔다르크>에도 출연했으며 4학년 때는 저항 정신과 여성 계몽 의식을 담은 <5년 후>라는 3막극을 졸업 연극제에 올렸다.

1931년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교사 희망자가 없는 지역이지만, 조선말로 가르칠 수 있다는 이유로 간도 용정에 있는 명신여학교 영어 선생으로 부임한다. 이곳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 주요한의 청탁으로 <피로 색인 당신의 얼골을>을 ≪동광≫에 발표하면서 등단한다. 이후 지병인 기관지염 때문에 서울로 돌아와 1932년 배화여고 교사로 부임한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 <이 생명을>, <조선의 딸 > 등을 발표해 김억, 김동환에게 격려를 받았으며, 춘원 이광수와의 교류도 시작되었다. 춘원은 모윤숙에게 ‘고개 위에 떠가는 구름’이라는 뜻의 ‘영운(嶺雲)’이라는 호를 지어 주고 첫 시집인 ≪빛나는 지역≫의 서문도 써 줄 만큼 사이가 각별했다.

1933년 첫 시집 ≪빛나는 지역≫을 출간했다. 이 시집은 여성 시집이라는 점에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는데 ‘조선이 가진 하나뿐인 여류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첫 시집 출간 후 해외문학파 동인들과 교류를 갖고, 극예술 연구회 회원이 되었으며, 순수문예지 ≪시원≫에 가입해 노천명과 함께 1930년대 주요한 여성 시인으로 활동했다. 1934년 7월 20일 춘원의 소개로 헤겔 철학을 전공한 철학박사 안호상과 결혼했다. 1936년 외동딸 안경선을 낳았고 해방 이후 별거를 하다가 1960년대에 이혼했다.
1935년 결혼 후, 여성으로서 유일하게 경성제국대학 선과를 2년 수료하고, 경성중앙방송국에 취직해 어린이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의 기획과 방송 대본 등을 직접 맡았다. 1937년 서간문 형식의 산문시집인 ≪렌의 애가≫(1937)를 발간했다. 500부를 인쇄한 이 책은 닷새 만에 매진되는 기록을 세웠다. 1941년부터 ≪신시대≫, ≪매일신보≫ 등에 일본의 대동아공영과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시와 논설문 등을 발표했다.

해방 이후 1947년, 시집 ≪옥비녀≫를 발간했고 박순천과 함께 여성운동을 했으며 유엔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9년 ≪문예≫지를 창간해 1954년 3월호까지 통권 20호를 발행했다. 이 잡지는 이후 ≪ 현대문학≫의 전신이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당시 애국시 낭송 방송을 하다가 피난할 기회를 놓쳐 경기도 광주 근처에 숨어 있으면서 신분이 발각될까 봐 죽으려고 수면제를 먹기도 했다. 광주에 숨어 있던 중 국군의 주검을 보고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쓰게 되었다. 1951년 4월 부산에서 피난 시절을 체험한 시편들을 모아 시집 ≪풍랑(風浪)≫을 간행했다. 1954년 1월에는 ≪렌의 애가≫가 국제 펜클럽의 심사와 추천을 거쳐 81개국에서 영역 출판하기로 결정되었으나 소련 유네스코 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같은 해 2월 한국 펜클럽 창립을 알선했다.

1955년 서울대 문리대 강사로 재직했고 한국자유문학협회 시 분과 위원장, 한국문화단체 총연합회 최고위원을 지냈다. 6월에는 초대 회장인 변영로, 김광섭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제7차 국제 펜클럽 비엔나 대회에 참석해 정식으로 펜클럽 인준을 받았다. 1959년 시집 ≪정경≫과 소설 ≪그 아내의 수기≫를 간행했다.

1960년 수필집 ≪포도원≫을 간행했고 5월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 회장에 선출되었다. 1962년에는 대한민국 정부 모란 훈장을 수상했으며 1965년에 예술원 문학상을 수상했다. 1967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 상을 수상했고 시, 수필을 엮은 ≪얼룩진 미소≫를 발간했다. 1968년 수필집 ≪회상의 창가에서≫를 출간했고, 이화여자대학교가 수여한 문화공로상을 받았다.

1969년 여류문인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70년 시집 ≪풍토≫가 발간되었고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으며 문화계 비례대표로 국회위원에 선임되어 문고위원의 일을 맡았다. 같은 해 서울에서 열린 국제펜클럽대회의 준비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74년 서사시집 ≪논개≫를 발간했으며 한국현대시인협회 제3, 4대 회장을 역임했다. 1977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12월 국제 펜클럽 대회에서 국제 펜클럽 부회장으로 인준되었다. 1978년 ≪영운 모윤숙문학전집≫이 발행되었다. 1979년 서사시 ≪황룡사 구층탑≫으로 3.1 문화상을 수여받고, 세네갈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이 무렵 서사시 <성삼문>을 집필하고 있었는데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다.

1980년 미국 뉴욕의 리치우드 출판사에서 ≪렌의 애가≫가 번역 출판되었다. 국제 펜클럽 활동을 하면서 엘리자베스 비숍, 로버트 프로스트 등의 시인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1987년 대한민국 예술원 원로회원이 되었다. 1990년 6월 7일 별세했고, 6월 8일 대한민국 금관문화상이 추서되었다. 1996년 ‘영운 모윤숙 문학 산실’의 문학비가 한남동 자택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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