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과의 만남은 나에게 매우 의미가 깊다. 포은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어린 시절에 포은 묘역의 경사진 잔디 위를 눈썰매 타듯이 미끄럼 탔었고, 초등학교에서 <단심가>를 배우고 나서는 “이 몸이 죽고 죽어~”를 읊조리며 능원리 시골길을 지나쳤다. 큰집 가까이에 포은 묘역이 있었기 때문에 수없이 지나쳤던 곳이다. 용인시의 대표적 문화제인 포은문화제를 기획하고, 포은학회를 창립하는 열정을 보인 것도 그런 인연 때문일 것이다. 어떻든 포은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내겐 행운이다.
포은은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니 죽은 뒤에도 이적을 남겨 신비 속에 감춰진 인물이다. 정치·외교·국방·문학·사상 등 다방면에 걸쳐 주목되는 관료 문인이다. 동방성리학의 조종으로 추앙되는 성현이다. 이 같은 성현의 자취를 더듬어 진실을 규명해 보고자 20여 년을 헤매었다.
나는 한문학 전공자임에도 포은을 만난 이후부터 연구 범위가 역사·철학·민속학·지역학까지 넘나들었다. 노둔한 필자의 과용이라는 것을 감출 수 없다. 나름의 변명을 덧붙인다면 다각적인 측면에서 포은을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포은 시문학의 재조명>이란 책자를 내면서 그동안 연구한 성과물을 갈무리하였다. 그리고 지금 이 책자를 내놓는다. 연구 성과물을 정리하면서 느낀 바를 요약하고, 보탠 것으로 보면 된다. 감히 ‘평전評傳’이라 책제를 붙였지만, 평가보다는 있는 사실을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시각에서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논리적 이해가 아닌, 감성적 이해를 통해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역사적 전환기에서 포은이 취한 선택을 추적하고, 선택에 있어서 최선의 ‘잣대’가 무엇이었을까를 찾아보고 싶었다. 포은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는 ‘값진 죽음’을 찬미하는 선대 학자들의 심상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포은도 고려를 저버리지 않고, 고려도 포은을 저버리지 않았다”라는 선대 학자들의 평을 이해하고 후대에 전하고 싶었다.
이 책자로 필자의 정년을 갈무리하는 것도 포은과의 인연인 것 같다. 아직은 지난 일을 기억할 수 있어서 포은과의 인연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만용을 부렸다. 포은을 기억하고 기록한다는 사실만도 내겐 행복이다. 이 역시 포은의 음덕이리라.
끝으로 이 책자를 엮는 데 누를 끼친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적는다. 포은학의 세계화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포은종약원 임원진에게 감사드린다. 포은 관계의 사업이라면 항상 마다하지 않고 지원해주는 포은 24대종손 정래정님에게 감사드린다. 포은학회를 계승하는 동학들에게 격려를 보낸다. 필자의 원고를 30년 동안 출판해준 한국문화사 김진수 사장의 배려에 감사드린다. 아울러 김태균 전무를 비롯한 편집진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기해년 단오절에 처인재에서 문수산을 바라보며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