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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저자 > 어린이/유아

이름:함기석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66년, 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주

직업:시인

최근작
2023년 11월 <모든 꽃은 예언이다>

21세기 한국시의 지형도

2010년대의 시는 진행 중이다. 2010년대의 시는 2000년대 시에 대한 승계와 부정이라는 양면성을 지닌 채 다채롭게 움직이고 있다. 어느 시대에나 시인은 시를 통해 자신 속의 무수한 통념과 죽은 미적 가치들, 굳어 버린 고체들의 세계를 목격하고 그것들을 제거하려 끊임없이 싸운다. 시인은 자기 육체 안의 참담한 죽음들을 목격한 후 다시 자궁으로 회귀하여 재탄생하는 존재고, 그것조차 불가능할 때 상징적 자살을 시로 형식화하여 다시 미지의 미(美)를 꿈꾸는 존재다. 시인은 늘 외부의 죽음과 함께 자기 내부의 죽음까지도 통렬하게 응시하며 싸우는 존재들이기에 자기 안의 수많은 다양함과 강렬함을 발견하기 위해서 늘 ‘열림의 우주’를 지향한다. 오염되고 타락한 내 몸의 위험한 해저, 그 혼돈과 야만의 바닥으로 잠수해 들어가 죽음의 풍경들과 싸우고 유희한다. 1990년대 시인들이 그러했고 2000년대 시인들이 그러했고 2010년대 시인들 또한 언어의 쇄신, 언어의 용법과 구조의 혁신, 세계관의 파열과 확장을 통해 시의 혁신을 도모하고 있으며 자기 육체 안의 무수한 죽은 세계와 맹렬히 싸우고 있다. 2010년대 시는 이렇게 진행형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시는 언제나 진행형이다. 2010년대 시 또한 죽음 같은 처절한 언어 모험과 발화 놀이를 통해 각자의 방식으로 미래를 살아내고 있다. 관습적 언어로부터 탈주해 안정된 체계 질서를 위반하면서 무자비한 미(美)를 향해 죽음의 불나방처럼 달려들고 있다. 그렇게 어떤 시는 발 없는 새가 되어 황량한 도시의 상공을 떠돌고, 어떤 시는 재의 강물이 되어 생의 첫 수원지였던 자궁으로 흘러들고, 어떤 시는 텅 빈 광장에서 홀로 담배를 피우는 유령이 되어 떠돈다. 2010년대 시는 이렇게 진행형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시의 초상은 다차원의 얼굴, 얼굴을 뭉개 버린 얼굴, 이목구비를 확정할 수 없는 진행형이다. 이 미완성 세계에서 2010년대의 어떤 시인은 또다시 감각과 인식의 지도를 바꾸고 있고, 어떤 시인은 폭약처럼 스스로를 파괴하여 강철 같던 통념의 벽에 균열을 내고 있고, 어떤 시인은 아무도 본 적 없는 극지의 오지를 탐험해 그 아름답고 기이한 지형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다. 어느 시대에나 시는 늘 상상하는 육체고 상상되는 육체다. 감각의 육체고 고통의 육체고 희열의 육체다. 21세기 시는 실재하지 않은 방식으로 실재하는 기이한 육체다. 현실이 시의 리얼리티를 낳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수많은 풍경과 사건과 뉴스들이 우리에게 실재로 수용되도록 조작 또는 작동된다. 이 교묘한 은폐성은 21세기 현실과 시의 중요 특질 중 하나다. 게임 속의 가상현실과 가상공간은 더 이상 가상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강력하게 지배하는 실재다. 21세기는 이미 우리가 창출한 현실에 의해 우리가 허구화되는 세계다. 우리 모두가 픽션 속의 허구적 등장인물로 개체화되는 세계, 우리가 우리의 보편 감각으로 수용했다고 믿는 풍경과 실체가 일루전일 수 있는 세계다. 이런 상황 속에서 2010년대 시인들은 움직이며 싸우고 울고 웃고 있다. 21세기 시의 매트릭스 현실은 미학적으로 재구성된 것이지만 현실 세계의 결여와 부재를 보완하는 대리 현실로 기능하면서 그 위상을 점점 높여 가고 있다. 이 매트릭스 인공 현실 안에 꿈과 자유와 해방을 갈망하는 2010년대 시인들이 직면한 현실의 암울이 있고 공포가 있고 희망이 있다. 이 암울과 공포와 희망이 이전의 선배들과는 다른 상상적 조작을 낳고 픽션의 상상력을 촉발하고 유희적 작란을 가속화한다. 2010년대의 낯선 언어들 또한 그들만의 실존의 현기이자 간절한 몸짓이다. 1990년대를 비롯하여 21세기 시인들이 남긴 수많은 발자국과 한숨과 가래들, 이들이 허공에 남긴 기묘한 담배 연기와 초승달과 죽은 새들, 이들이 죽음의 다리 난간에서 몸을 던지지는 못하고 울면서 돌아설 때 내가 보았던 그 아픈 눈빛들, 지난 10여 년 동안 나는 이들이 남긴 뜨거운 숨결과 비명, 웃음과 가래침, 콧물과 눈물을 받아먹으며 그들 가슴 깊이 들어가 그들이 절실하게 마주했던 세계와 나 또한 절실하게 마주하고자 했다. 이 책은 그 흔적이자 편린이다.

고독한 대화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새들이 날아간다. 붕붕거리는 하얀 벌떼처럼 눈들은 허공을 떠돌다 어디론가 사라진다. 새들이 내려앉은 솔숲 위에서 하늘이 펄럭인다. 하늘을 만져본다. 하늘은 표면이 없어 손으로 만질 수가 없다. 형태도 크기도 무게도 가늠할 수 없다. 하늘은 변화하는 유기적 총체의 공간일 뿐 그려질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아니다. 이 아님 이 부정이 공간에 대항하는 투쟁을 낳고 현대의 예술은 공간과의 싸움, 시간과의 싸움, 통념과의 싸움, 예술과의 싸움, 현대성과의 끝없는 싸움에서부터 출발한다. 화가들은 자신의 예술품 속에 담기는 이미지 공간, 그런 공간들을 담고 있는 캔버스라는 공간, 캔버스가 전시되는 현실이라는 공간, 그런 현실들을 몸에 담고 흘러가는 현대사회라는 괴물과의 투쟁을 통해 현대 너머의 또 다른 세계로 모험을 떠난다. 화가들은 색채, 형태, 재료, 기법 등과의 싸움을 통해서, 음악가들은 소리, 상상, 침묵이 구현되는 악보라는 추상의 음률 공간을 통해서, 시인들은 언어, 꿈, 형식 등과의 싸움을 통해서 새로운 우주로 탐험을 떠난다. 그러기에 현대의 예술가들은 안정이 아닌 불안정, 확정이 아닌 불확정, 결정이 아닌 미결정, 빛이 아닌 어둠의 좌표 속을 점처럼 떠가는 미지의 탐험우주선들과 흡사하다. 어른들이 풍경화 속에 하늘을 그릴 때 사실은 하늘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의 거리를 그리는 것이다. 하늘이라는 대상에 대한 자신의 고정관념을 그리는 것이다. 어른들이 문장 속에 구름을 표현할 때 사실은 구름에 대한 통념과 관습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때 예술적 표현의 대상이 된 하늘과 구름은 어른들의 정형화된 시각과 해석의 감옥에서 얼마나 답답하고 상처받을까. 그런데 아이들의 그림이나 동시에는 이런 거리가 소멸하고 사물의 형태나 크기가 아주 자연스럽게 변형되어 나타난다. 의식과 사고 이전의 감각들이 매우 유머러스하게 등장한다. 아이들은 하늘을 접어 바지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도 하고 구름을 주물러 장난감 강아지를 만들기도 한다.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은 17층 아파트보다 더 크게 그리고 입이 코 위에 붙은 사람들을 멋지게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러한 아이들의 지각패턴을 신체기관과 감각기관의 미성숙 때문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될 일이다. 예술사는 단순히 말해 지각패턴의 변화의 역사가 아니던가. 할머니를 늘 공항에서 배웅하던 어린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할머니를 태운 비행기가 점점 멀어지다가 하늘 속으로 쏘옥 사라지는 것을 늘 신기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며 날아오르기 시작하자 아이는 상기된 표정을 지으며 옆자리의 친구에게 속삭인다. “우린 언제부터 작아지기 시작할까?” 나는 아이들의 이런 천진한 눈길과 마음이 담긴 예술작품을 좋아한다. 회화가 회화이기를 그치는 한계에 도달하려는 회화들, 조각이 조각의 전형을 거부하고 탈(脫)조각으로 비상하려 꿈꾸는 조각들, 음악이 음악의 확정된 국경을 월경(越境)하려는 음악들, 시가 시의 제한된 도구적 기능과 형식을 넘어서려는 낯선 모험의 시들을 좋아한다. 고착된 시선에 대한 반항과 도전이 유머와 익살로 표출된 창조물들을 좋아한다. 낙서나 아이들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장 뒤뷔페(Jean Dubuffet, 1901~1985)의 작품에서 내가 우선적으로 만나는 것은 선의 자유분방함이다. 선들의 속도와 흐름 속에 스미어 있는 해학과 위트에 나는 매료된다. 「전화고문」, 「벽에 오줌 누는 사람들」, 「영양섭취」, 「코 푸는 사람」 같은 작품들에는 작가 특유의 유머 감각과 비판적 농담이 천진하게 스미어 있다. 일반적으로 작품형성의 3요소라 하면 예술가, 대상, 재료를 말하는데, 화가가 대상과 재료를 선택하고 조종하는 것과 달리 뒤뷔페는 재료의 자발성에 큰 비중을 두고 작업을 한다. 그에게 재료는 화가의 의도보다도 더 많은 능력을 가진 신기한 마티에르인 것이다. 그는 물감에 모래나 유리조각 같은 것들을 섞어 바르기도 하고, 화면을 긁거나 파는 것처럼 상처를 내기도 한다. 당연히 화가의 의도보다 재료 자체에 의해 발생되는 우연성이 화폭에 담기면서 화가의 무의식까지 드러나게 된다. 뒤뷔페가 재료의 자발성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호앙 미로(Joan Miro, 1893~1983)는 행위 중심의 표현방식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밑그림 없이 직접 캔버스에 직접 그림을 그린다. 어떤 대상이나 주제를 미리 설정해놓고 작업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무(無)에서 출발한다. 물감을 흘리거나 붓을 미끄러트려 엉뚱한 이미지들을 탄생시킨다. 그에게 캔버스는 대상이나 이미지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추상기호들의 초현실적 유희공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회화는 구체적 이미지 중심의 사고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무너뜨린다. 이런 행위중심의 회화표현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화가로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이 있다. 바닥에 엄청나게 큰 화폭을 깔아놓고 물감을 뿌리거나 흘리는 드롭 페인팅을 시도했던 폴록은 그렇게 함으로써 회화의 일부가 된 느낌을 받는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는 그리는 대신에 뿌리고 던지고 밟고 뭉갠다. 이는 회화가 화가의 자아표현이라는 기존의 관념을 넘어선 것이고 화폭은 현실이나 대상을 재현, 구성, 분해하는 표현공간이라기보다는 행위를 위한 경기장 혹은 행위 자체로의 몰입을 체험하는 놀이공간에 가깝다. 뒤뷔페가 재료의 물질성을 문제 삼았다면 폴록은 재료들의 복합공간인 화폭과 회화의 평면성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나는 폴록의 즉흥적이고 무의식에 가까운 창작 행위도 좋아하지만 그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1904~1997)의 거칠고 과격한 붓놀림도 좋아한다. 그의 터치는 난폭하고 공격적이지만 그 만큼 섬세하고 매혹적이다. 그들은 모두 그린다는 행위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근본적 회의와 부정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회화를 모색했던 예술가들이다. 나는 그들의 이러한 관점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린다는 것은 단순한 테크닉이 아니라 삶의 중요한 창조 행위이고 작품 속에 당연히 그 행위 과정이 녹아들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예술품을 감상할 때 나는 가능한 감각과 본능에 따라 즉흥적으로 반응하고 상상하는 편이다. 그와 동시에 내게 전해진 감동과 울림의 세부를 확인하기 위해 대상 예술품을 정밀하게 해부하고 분석하기도 한다. 내게 글쓰기는 이 두 개의 시스템이 중층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이다. 무의식과 의식이 지속적으로 오가는 길항과 배반의 과정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쓸 때 한없는 자유를 느끼면서도 강력한 억압을 동시에 느낀다. 그래서 글쓰기 자체를 문제시하고 일탈을 꿈꾸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글을 쓰면서 글의 소멸을 꿈꾸고, 글의 양이 늘어날수록 글의 최소화를 욕망한다. 극소화된 자아와 언어와 세계의 삼위일체를 무의식적으로 욕망한다. 이처럼 사물이 갖는 시각적 형태를 극소화하려는 예술가들이 있다. 이들은 주로 순수추상계열의 작가들이다. 순수추상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시에서 본다는 감각 행위와 표현한다는 언어 행위와 해석한다는 감상 행위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연결된다. 어떤 사물을 본다는 것은 그 대상을 전체 속의 하나의 장소 하나의 공간에 위치시킨다는 것이다. 대상에 내재된 시간과 이미지와 내적 긴장을 동시에 감각한다는 것이다. 회화에서의 긴장은 형태, 색채, 명암, 배경 등에 의해 유발되고, 음악에서의 긴장은 음의 파고, 파장, 공간, 연주자의 감정 등에 의해 유발되고, 시에서의 긴장은 리듬, 형식, 대상, 서사, 화자의 미묘한 심리 등에 의해 유발된다. 어느 장르든 예술의 대상은 물적 대상 자체를 넘어선 주관적 오브제이면서 크기와 방향을 갖고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비물질적 정신인 것이다.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1878~1935)는 물적 대상들을 기하학적으로 제거하여 추상의 세계로 진입한다. 나에게 말레비치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누드 해변이다. 이곳에서 사물들은 옷을 벗는다. 구두를 벗고 모자를 벗고 양말을 벗는다. 모래는 모래라는 인식의 옷을 벗고 정물은 정물이라는 형태의 옷을 벗는다. 사각형은 사각형을 벗고 새로운 사각형으로 탄생한다. 그는 사물들을 사각형으로 치환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을 사물들 밖으로 완전히 내보냄으로써 사각형을 낳는다. 거기에 자신이 투영된 색을 입힌다. 말레비치의 추상회화는 인간과 세계의 단절, 자아와 대상간의 단절, 언어와 사물 사이의 간극을 직시하게 한다. 그 관계의 미학에 대한 비판적 해석과 반성의 시간을 갖게 한다. 색과 형태가 환기시키는 비(非)물질성, 비(非)대상성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한다. 언어를 통해 언어를 부정하고자 하는 현대의 시인들처럼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사각형 그림들은 사각형의 시선에 의해 사각형으로 구획된 사각형의 세계를 사각형을 통해 지워버린다. 엄밀히 말해서 말레비치의 사각형 회화에 사각형은 없다. 그의 사각형은 어떤 생물 혹은 무생물, 즉 하나의 대상을 단순 추상화시켜 놓은 추출물이 아니다. 대상의 표현 불가능성을 사각형이라는 극단적 형식으로 시각화하고 있는 것이다. 사각형은 언제나 열려 있고 붉은 사각형은 언제나 붉게 비어 있다. 그에게 사각형은 소멸로 가는 존재의 입구였던 셈이다. 그가 후에 흰 바탕 위에 흰 사각형을 그려 세계와 사물의 무(無)를 직시하라고 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앞에서 언급한 몇몇 예술가들은 기존의 미적 가치관이라는 벽에 오줌을 갈긴 작가들이다. 화가 자신의 신체개입이 작품의 리얼리티를 결정하는 중요 요소로 작용하는 행위적 회화작업을 한 예술가들이라 할 수 있다. 행위에는 필연적으로 시간이 개입되고, 행위의 연속은 운동이라는 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들은 공간의 변형, 빛의 변형, 통념의 해체를 통해 사라진 시간과 함께 사라진 세계, 사라진 꿈, 사라진 자아, 사라진 자신의 흔적과 고통을 함께 그린 것이다. 혹자는 그들의 작품이 추상적이고 모호해서 현실감이 없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어떤 구체적인 예술품보다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들은 모두 기존의 화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일생을 통해 자신과의 싸움에 치열했고 진실했다. 내가 그들의 예술과 예술정신을 사랑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독일의 가수이자 배우이고 파스빈더(Rainer Werner Fassbinder, 1945~1982) 영화감독의 아내이기도 했던 잉그리드 카벤(Ingrid Caven, 1938~ )에 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호텔에 숨어 있다. 그들은 도피중인 사기꾼 커플이다.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다시 가방을 챙긴다. 여자는 벽에 걸려있던 재스퍼 존스(Jasper Johns, 1930~ )의 그림을 가방에 챙겨 넣는다. 남자가 의아한 듯 묻는다. “이 그림 가져가려는 건 아니지? 모조품이잖아?” 그러자 여자가 말한다. “그럼, 우리는, 우리는 진짜인가?”

국어선생은 달팽이

나의 방에서 시간이 새의 자세로 자고 있다 귀엔 핏물처럼 흘러내리는 꿈 활짝 창을 열자 시간은 두 날개를 펴더니 허공 저편으로 날아간다 대부분 25년 전에 부화된 어린 시들이다 등단작 몇 편을 추가했다 오래전 나의 아픈 몸이었던 말과 사물들과 숨결들 안녕! 잘 가라 나는 다시 백지고 어둠이고 머나먼 음역(音域)이다 2019년 1월

모든 꽃은 예언이다

비는 계속되고 나는 또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먼 길을 나선다 2023년 가을

뽈랑 공원

발이 저린 날 코에 침을 바르고 허공을 본다. 새들은 하늘을 자르며 놀고 있고 붓꽃 속에서 누가 하모니카를 불고 있다. 소리들이 푸른 물고기가 되어 너의 창으로 헤엄쳐가고 있다. 2008년 봄

수능 예언 문제집

이 책에 등장하는 두호, 도경, 현이, 영교 들은 우리 청소년들의 초상이다. 그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 혹시 지금 말 못 할 슬픔에 빠져 있다면 너무 절망하지 말라고. 눈앞의 장밋빛 성공이 먼 미래의 꿈과 비전을 반드시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눈앞의 먹구름 낀 암울한 성적표가 미래의 꿈과 희망을 좌절시키는 것도 아니니까. 세상엔 그 반대 사례가 너무도 많으니까. 오늘 밤 어둠이 깊을수록 내일 아침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 빛은 더욱 밝고 눈부시니까.

오렌지 기하학

코흐곡선 해안을 걷고 있다 벼랑 끝 하늘로 물고기들은 헤엄쳐 오르고 죽은 자들의 숨이고 육체였던 저 투명한 대기 속에서 빛이 제 눈을 검게 태우고 있다 제로(0)인 너와 제로(0)인 내가 만나 무한(∞)이 되었다가 더 큰 제로(0)로 되돌아가는 아름답고 비정한 원(Circle)의 우주 그것이 그대로 삶이고 죽음이고 사랑인 시 세계는 제로(0)와 무한(∞) 사이에서 녹고 있는 눈사람(8) 자신의 부재를 자신의 몸 전체로 목격하고 기억하기 위해 눈동자부터 녹아내리는 진행형 물질 우린, 죽음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 2012년 6월

음시

산 자의 죽은 말과 죽은 자의 죽지 않는 말 사이에서 몸도 빛도 꿈도 어휘도 재의 혼령으로 떠돌았다 백지는 눈 내리는 나의 명부(冥府) 시는 길들여지지 않는 암흑, 야수의 공간이다 내 이름은 잉(~ing), 나는 진행형 비(非)인간 명(命)도 운(運)도 버린 고아가 된 흑조가 천지를 빙빙 돌았다 2022년 2월 함기석

착란의 돌

두 번째 시집을 묶는다 많이 방황했고 조금은 아팠다 내가 방황하는 동안 나보다 더 방황한 것은 나의 구두였다 내가 아파하며 밤길을 가는 동안 나보다 더 아파한 것은 구두 속에 갇힌 어둡고 냄새나는 세상이었다 구두 속으로 폭설이 내리고 길이 사라지고 나무들이 집들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하나 둘 얼음으로 변해갔다 구두를 사랑하기가 구두를 먹기보다 어려웠다

코 도둑, 비밀탐정대

꿈을 잃은 사람은 물기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꿈을 잃은 사람은 날개 없는 새와 같습니다. 꿈이 없는 미래는 별 없는 밤하늘이고 꿈이 없는 미래는 사막입니다. 꿈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샘입니다. 꿈은 우리에게 내일을 열어주는 빛입니다. 꿈을 잃지 않고 작은 꽃과 나무, 작은 새와 곤충들까지 친구로 생각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꿈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듭니다.

크로노스 수학탐험대

안녕, 어린이 친구들! 이 책은 시간여행 판타지 수학동화입니다. 수학의 세계를 탐구하고 조사하다 마왕 카오스쿰란이 지배하는 혼돈의 세계로 실종된 아버지를 찾아 두 남매가 역사 속으로 시간탐험을 떠나는 모험 이야기입니다. 각 장마다 다양하게 주어지는 미션 문제를 함께 풀어보고, 유명한 수학자들과도 직접 만나보세요. 크로노스는 그리스어로‘ 시간’을 뜻합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태초 신의 이름으로 해가 뜨고 지는 자연의 시간, 지구의 공전과 자전에 의해 결정되는 시간, 생명체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태초의 우주가 시작될 때부터 크로노스와 함께 무수한 별과 어둠 사이에서 수학은 숨쉬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린이 친구들! 수학의 세계는 놀라운 모험의 세계고,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고, 신나고 재밌는 놀이의 세계입니다. 자연과 우주는 수학이 펼치는 아름다운 마법이고 신기한 마술입니다. 『크로노스 수학탐험대』가 수학의 세계에 대한 여러분의 눈과 마음을 활짝 열어주는 소중한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통해 수학과 참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흥미로운 수학의 세계로 함께 모험을 떠나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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