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독일을 대표할 수 있는 유명단편들을 선정하여 독문학 전공자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쉽고 유익하게 읽을 수 있도록 우리말로 옮겨놓은 단편모음집이다.
옮긴이는 대학에서 매학기 독일문화를 교양과목으로 가르치면서 우리에게 독일의 단편문학은 영미나 프랑스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도 덜 알려져 있음을 확인해왔다. 학기마다 1백 명이 넘는 수강생 가운데 브렌타노, 클라이스트, 슈토름과 같은 독일의 유명 단편작가들을 알고 있는 학생은 거의 전무할 정도였다. 반면 오 헨리, 헤밍웨이, 하디, 모파상, 체호프 등 영미나 프랑스, 러시아의 단편작가들은 대부분이 익히 알고 있었다.
대학생들이 이런 실정이니 일반인들의 독일 단편 작품 및 작가에 대한 인지도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세계문학 속에서 다른 나라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온 독일의 작가들이 적지 않은데도 그들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오래도록 무지상태로 내려온 데 대해 독문학도의 한 사람으로 자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동안 독일단편으로부터 소외돼 온 일반인들이 독일단편의 면모를 살필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대표적 독일단편들을 골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런 작업을 하게 된 또 하나의 동기는 독문학전공 학생들에 대한 안타까운 강의체험에서 비롯되었다. 옮긴이는 20여 년 동안 강단에서 독일 단편문학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많은 작품을 접하게 하도록 노력해왔으나 여건상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전공과정의 학생들이 가급적 많은 작품들을 원어로 어려움 없이 읽으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심층적으로 해석해 나간다면 이보다 더 이상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편분야에 배정된 제한된 시간과 학생들의 제한된 언어능력은 원어 텍스트들 역시 제한적으로 소화해낼 수밖에 없게 한다. 그리하여 힘겹게 채찍질하며 진행해도 한 학기 강좌를 통해 겨우 한두 편의 작품만 원어로 힘겹게 읽어 내려가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솔직한 현실이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 앞에 극소수 작품만을 접하는 원어강독의 비효율성과 불충실성을 보완하고, 학생들에게 시간을 적게 들이면서 많은 작품을 이해할 수 있게 함으로써 한정된 시간 속에서도 독일 단편문학의 포괄적 이해를 가능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표적인 유명단편들을 부득이 우리말로라도 많이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현명하리라는 판단을 했다.
작품 선정에 있어서는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우선 독문학계에서 통상적으로 입에 많이 오르내리고, 전공 텍스트로의 활용도가 높은 작품들에 비중을 두었다. 이렇게 선정된 작품들은 독일의 대표단편으로 평가받는 데에 별 무리가 없으리라 본다.
작품배열은 과거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문예사조순으로 했다. 그리하여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이르는 고전주의사조의 대표작인 괴테의 『노벨레』를 필두로 반고전주의 단편인 클라이스트의 『칠레의 지진』, 낭만주의에 속하는 티크의 『금발의 에크베르트』와 브렌타노의 『착한 카스페를과 어여쁜 안네를의 이야기』, 사실주의 작품인 슈토름의 『임멘 호』, 인상주의에 속하는 슈니츨러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자연주의의 대표작인 하우프트만의 『선로지기 틸』, 20세기 초 표현주의의 상징적 작품인 카프카의 『변신』에 이어 마지막으로 2차대전 직후에 나온 전후 폐허문학의 대표작인 보르헤르트의 『빵』과 린저의 『붉은 고양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10편을 문예사조순으로 차례로 배열했다.
여기에서 특별히 염두에 둔 것은 작품들을 읽어나감으로써 자연스럽게 독일 단편문학의 전반적인 흐름과 특징을 파악할 수 있도록 문예사조별로 대표적 명작을 선정하여 옮긴 점이다. 예컨대 괴테의 『노벨레』에서는 사람과 맹수와의 교감을 소재로 인간과 자연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이상적 세계상을 그림으로써 조화와 균제라는 고전주의의 문학이념이 드러나고 있으며, 깊은 숲 속에 사는 한 여인이 지나온 삶을 회상하는 가운데 환상이 현실을 넘나들면서 현실보다 더한 실존을 이루는 티크의 『금발의 에크베르트』는 낭만주의적 꿈과 환상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성실한 근로자가 하루아침에 흉측한 벌레로 변하여 가족과 주변세계로부터 버림받아 죽어가는 과정을 그린 카프카의 『변신』은 현대인의 소외라는 사회적 문제성을 그로테스크한 분위기 속에서 강렬하게 표출함으로써 표현주의의 속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문예사조와 연관 지어 볼 때 고전주의 단편에서는 질서와 조화를 이룬 이상적 세계상이 추구되고, 반대로 반고전주의 작품에서는 균형과 조화를 깨는 파격적인 묘사와 섬뜩하고 조악한 세계상이 나타난다. 낭만주의 작품에서는 특유의 비현실적이며 몽환적인 세계가 꿈과 환상을 이끌며, 이와 대조적으로 사실주의 작품에서는 실제적인 세계의 현실적 상황이 빈틈없이 묘사된다. 자연주의 작품에서는 지루하리만큼 세밀한 자연묘사와 함께 소시민적 삶의 애환과 갈등이 치밀하게 다루어지며, 인상주의의 작품에서는 인간내면의 의식의 흐름이 첨예한 인상을 불러일으키면서 예리하게 행동화되어 표출되고, 표현주의 작품에서는 현대인의 모순과 부조리가 그로테스크한 영상으로 그려진다. 또한 전후 폐허문학에 속하는 단편에서는 전쟁이 초래한 부조리한 현실과 비인간성이 적나라하게 고발되고 있다.
이렇듯 이 책에서 독자는 작품들을 쉽고 흥미롭게 읽어 내려가면서 문예사조의 변천과 맥을 같이 하는 독일 단편문학의 시대별 흐름을 자연스럽게 인지하게 될 것이다. 특히 책의 말미에 해당 문학사조의 특성을 개관함으로써 작품과 사조를 보다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독자가 작품을 좀 더 쉽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고 아울러 이 책이 단순한 작품모음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상한 문학교양서로서의 역할도 병행할 수 있도록 했다.
아무쪼록 이 책이 일반 독자들에게 독일 단편문학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유익한 읽을거리가 될 뿐만 아니라 독문학도들의 전공연구에도 좋은 보조자료로 활용되길 기대한다.
프란츠 그릴파르처(1791∼1872)가 30년 가까이 구상하여 말년에 완성함으로써 그의 최후 작품으로 기록되는 『톨레도의 유대여인』은 12세기 스페인 카스티야 왕국에서 있었던 국왕과 유대인 소녀와의 비극적 사랑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5막의 역사비극이다.
청순하고 당돌한 유대인 소녀 라헬은 어느 날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 톨레도에 있는 왕궁 정원에 들어가 국왕 부부를 깜짝 놀라게 한다. 왕비 레오노르는 그녀의 막무가내적인 오만불손한 태도에 역겨워하지만 알폰소 국왕은 낯선 이교도 소녀의 열정적 모습에 매료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국왕은 유대 소녀 라헬의 애교와 매력에 점점 더 깊이 빨려든다. 카스티야 왕국이 외적인 무어족의 위협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시점에 국왕은 유대인 소녀와의 사랑에 빠져 통치자로서의 의무를 완전히 망각한다. 국왕 대신 국사를 떠맡은 왕비와 국왕의 봉신들은 유대인 소녀를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장본인으로 규정하고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한다. 라헬이 처참하게 살해된 후 국왕은 비로소 자신의 본분으로 돌아와 적과의 전투에 나서며, 다시 통치자로서 자신의 본래 의무를 깨닫게 된다.
이처럼 이야기의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이 작품은 국왕과 왕비와 유대소녀 사이의 애증과 갈등을 치밀하게 묘사하면서 무언가를 더 끼워 넣거나 뺄 수 있는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긴밀한 언어표현과 탄탄한 구성으로 극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그리하여 일부 비평가들은 『톨레도의 유대여인』을 독일어권 최고의 드라마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번역되어 소개된 적이 없는 낯선 작품으로 머물고 있다. 이 드라마를 쓴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츠 그릴파르처 또한 독일 사실주의의 전초인 비더마이어(Biedermeier)를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오스트리아의 국민작가로 추앙받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편이다.
이에 옮긴이는 우리 독문학계가 파고들어야 할 영역에 중요한 사각지대가 남아있다는 데 대해 학자의 한 사람으로 반성과 각성을 하면서 이 작품을 우리말로 옮겨 우리 독자들에게 처음으로 선보이기로 했다.
작가와 작품 모두 우리의 독자대중에게 친숙하지 않은 점을 고려하여 서두에 비교적 자세하게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조명하고, 작품의 성립배경과 내용에 대해 해설함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돕도록 했다.
이 작품은 작가가 고전드라마의 양식을 바탕으로 썼으므로 번역에서도 가급적 원문텍스트의 운문극적 형태를 그대로 살렸다. 본문에 이따금 등장하는 주석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옮긴이가 단 것으로 원문에는 없는 것임을 밝힌다.
국내 최초로 우리말로 옮겨 소개되는 만큼 이 번역물이 독자들로 하여금 그릴파르처의 극문학과 친숙해질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또한 독어독문학 전공자들은 부록으로 실은 독일어 원문 텍스트를 통해 보다 생동감 있는 작품의 진수를 맛보길 기대한다.
끝으로 이 작품을 옮기는 데 있어 애매하거나 미묘한 표현을 우리말 감각에 최대한 가깝게 다가서도록 도와주신 공주대학교 독어독문학과의 그라우만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린다.